이 표는 본래 미아갓 님의 블로그(http://ff14-mia.tistory.com/23)에 만들어져 있었던 양식을 가져온 것으로서, 원 양식 제작자 미아갓 님의 허가를 받아 양식과 색상을 재편집하여


본인이 다시 만들었습니다.



* 노란색은 땅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광부로 얻을 수 있는 물품을, 연두색은 초목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원예로 얻을 수 있는 물품을 표기 하였습니다.


* [무]는 무작위 위치에 생성되는 자원을 나타냅니다.



파이널 판타지 14 미지의 채집 목록 - 창천의 이슈가르드 바로가기


파이널 판타지 14 미지의 채집 목록 - 홍련의 해방자 바로가기


파이널 판타지 14 미지의 채집 목록 - 칠흑의 반역자 바로가기




신생 에오르제아


에오르제아 시간으로 세 시간 이내에 채집해야 합니다.(암철 광맥을 예로 들었을 때 새벽 01시 02분에서 04분 사이에 커르다스 중앙고지에 암철 광맥이 나타나며, 세 시간 뒤인 새벽 04시 02분이 되면 광맥이 사라지므로 그 시간 안에 채집해야 합니다.)


1 성 채집 요구 조건 : 획득력 353 / 감별력 332


2 성 채집 요구 조건 : 획득력 408 / 감별력 389


3 성 채집 요구 조건 : 획득력 420 / 감별력 420 


시 간

채 집 물

위 치


시 간

채 집 물

위 치

01:00

 [3] 암철 광석★

커르다스 중앙고지


07:00

 [2] 블러드 오렌지★★

고지 라노시아

 [4] 생고치★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


 [6] 대나무 목재★★

02:00

 [7] 강력한 그림자 바위★★

동부 다날란


08:00

 [6] 라노시아 부추★★

서부 라노시아

 [6] 티놀카 찻잎★★

검은장막 숲 중부삼림


 [무] 물새 깃털★★

 [6] 검은장막 향목★★★

검은장막 숲 남부삼림


09:00

 [6] 금 광석★

동부 다날란

03:00

 [6] 철중석★★

북부 다날란


 [7] 코브란 유충★

 [7] 토파즈 원석★★


 [2] 살구★★

중부 라노시아

 [8] 근청석 원석★★


 [1] 파인애플 씨앗★

동부 라노시아

 [4] 비수액★★

검은장막 숲 북부삼림


 [4] 파인애플★

04:00

 [6] 자연금★★

중부 다날란


 [6] 가문비나무 원목★

커르다스 중앙고지

 [7] 에메랄드 원석★★


10:00

 [6] 측백나무 원목★★★

검은장막 숲 중부삼림

 [8] 다이아몬드 원석★★


13:00

 [7] 검은송로★

동부 다날란

 [6] 백금 광석★★

남부 다날란


 [1] 제멜 토마토 씨앗★

동부 라노시아

 [6] 흑단나무 원목★★★

중부 라노시아


 [2] 제멜 토마토★

05:00

 [5] 물 클러스터

서부 다날란


 [8] 흡혈귀나무★

커르다스 중앙고지

 [8] 3등급 다날란 겉흙★


17:00

 [1] 라노시아 암염★

동부 라노시아

 [2] 금모래★

동부 다날란


 [1] 로즈메리★★★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

 [1] 꿀레몬 씨앗★

동부 라노시아


 [2] 사베네어 겨우살이★

커르다스 중앙고지

 [2] 꿀레몬★


18:00

 [7] 루비 원석★★

저지 라노시아

 [1] 연령초★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


 [8] 사파이어 원석★★

06:00

 [7] 그림자 바위★

검은장막 숲 남부삼림


19:00

 [3] 불 클러스터

중부 라노시아

 [8] 3등급 검은장막 겉흙★


 [8] 3등급 라노시아 겉흙★

 [6] 연한 시금치★

저지 라노시아


21:00

 [7] 성극암★

커르다스 중앙고지

 [6] 고급 검은장막 향목★★

검은장막 숲 중부삼림


 [7] 작은 만드라고라★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





 [8] 연령초 구근★







신생 에오르제아 - 한정품 채집


시 간

채 집 물

위 치


시 간

채 집 물

위 치

01:00

 [1] 무리 지렁이

커르다스 중앙고지


01:00

 [2] 마즐라야의 들풀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

03:00

북부 다날란


02:00

검은장막 숲 중부삼림

04:00

중부 다날란


05:00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

09:00

남부 다날란


06:00

저지 라노시아

18:00

저지 라노시아


08:00

서부 라노시아





13:00

동부 다날란





17:00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





21:00







신생 에오르제아 - 기타


시 간

채 집 물

위 치


시 간

채 집 물

위 

01:00

 [무] 무속성 크리스탈

 [무] 암흑물질 클러스터★★

커르다스 중앙고지


07:00

 [무] 무속성 크리스탈

 [무] 암흑물질 클러스터★★

고지 라노시아

검은장막 숲 동부삼림


08:00

서부 라노시아

02:00

검은장막 숲 중부삼림


09:00

동부 다날란

검은장막 숲 남부삼림


동부 라노시아

03:00

북부 다날란


커르다스 중앙고지

검은장막 숲 북부삼림


13:00

동부 다날란

04:00

중부 다날란


17:00

동부 라노시아

남부 다날란


18:00

저지 라노시아

05:00

서부 다날란


19:00

중부 라노시아

동부 다날란


21:00

커르다스 중앙고지

06:00

검은장막 숲 남부삼림





저지 라노시아











신생 에오르제아 - 클러스터


* [1]번과 [8]번 위치중 무작위로 암흑물질 클러스터나 무속성 크리스탈이 나타납니다. 


시 간

채 집 물

위 치


시 간

채 집 물

위 치

01:00

 [2] 번개 클러스터

 [3] 불 클러스터

 [4] 바람 클러스터

 [5] 물 클러스터

 [6] 얼음 클러스터

 [7] 땅 클러스터

모르도나


13:00

 [2] 번개 클러스터

 [3] 불 클러스터

 [4] 바람 클러스터

 [5] 물 클러스터

 [6] 얼음 클러스터

 [7] 땅 클러스터

모르도나


05:00


17:00


09:00


21:00




30년은 됐을 듯싶다. KBS-TV에서 문학작품을 극화 방영하는 ‘TV문학관’이란 프로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인가, 방영시간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심취하였다. 시청한 것 중에 아직껏 기억되는 것이 이문열의 금시조다. 글씨라는 하나의 길을 가면서 스승(석담)과 제자(고죽)간의 갈등을 소재로 하는데, 등장인물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글씨란 도인가? 예인가? 글의 궁극은 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스승과 실용적 예술을 주장하는 제자가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애증의 세월을 그리고 있다. 제목도 생소하려니와 극 중의 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스승인 석담과 친구와의 대화 장면이다. ‘어찌하여 고죽을 제자로 거두려 않느냐?’는 물음에 석담은 왕희지의 말을 빌려 ‘비인부전’이라고 짤막하게 심중을 토로한다. ‘비인부전’이라? 사람이 아닌 사람에겐 전할 수 없다? 그 한마디가 비수와도 같이 뇌리를 깊숙이 파고든다. 석담이 말하는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전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목적적 의미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세월이 한참이나 격한 지금, 간간이 세간에 떠도는 ‘비인부전’이 옛일을 상기케 한다. 이제 심중에만 담아두었던 그 비수를 끄집어내어 의미를 밝혀보려 한다. 발생적 상황과 시대에 따른 활용사례, 그리고 오늘의 관점에서 교훈적 의미를 도출해보고자 한다.


‘비인부전’의 근원은 중국 고전 “황제내경의 기교변대론”에서 찾는다. 소문 제69편에 “其人不教 是謂失道 傳非其人 慢泄天寳”란 문장이다. ‘사람은 가르치지 않으면 도를 잃고, 사람이 아닌 사람을 가르치면 오만하여 도를 누설한다.’로 풀어볼 수 있고, 의역하여 이해를 돕자면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도를 알지 못하고, 모자란 사람에게 도를 가르치면 오히려 도를 그르친다.’로 해석할 수 있다. 후세의 사람들은 위 문장에서 ‘사람이 덜된 사람을 가르쳐선 안 된다.’는 교훈을 도출하였고 ‘비인부전’으로 의미를 축약한다.


‘비인부전’의 활용사례로는, 몇 해 전 방영된 최완규 극본의 드라마 ‘허준’과, 멀리 중국의 선불교 6대 조사 혜능이 법맥을 전수 받는 과정을 들 수 있다. 먼저 시대 순으로 앞선 혜능의 예를 보자. 중국 선불교는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선사를 시조로 한다. 달마선사의 대를 이어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이 법맥을 잇는다. 5조 홍인이 제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비인부전’의 용례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문하에는 오랫동안 학업을 닦은 뛰어난 제자 신수가 있어 의당 그가 법맥을 이을 것으로 보았는데, 홍인은 뜻밖에도 경력도 일천한 혜능이라는 신참내기에게 법을 전수하게 된다. 혜능이란 자는 누구이기에 홍인의 마음을 잡았는가? 그의 근기(根器)가 신수를 능가하는가? 혜능은 가난하고 무식했던 젊은 시절 한 객승의 금강경을 듣고 불교에 귀의할 뜻을 굳혔고, 홍인의 문하에 들어간다. 홍인은 혜능의 그릇을 알고 법맥을 전수할 것을 작심한다.

문제는 문하식구들이다. 아무리 법맥전수가 홍인의 전권이라도 해도 문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법력 일천한 혜능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홍인은 자신의 선택에 합당성을 부여하고자 방법을 모색한다. 신수와 혜능에게 시를 짓도록 하여 대중 스스로가 감득하도록 한다. 먼저 신수의 시다. “몸은 보리수이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다.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로 짓고, 뒤이어 혜능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또한 거울이 아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라고 대응한다. 사물을 꿰는 두 사람의 심안이 그러하였다. 홍인은 두 제자의 시를 들어 보이며 혜능에게 법을 전한다.


다음은 드라마 ‘허준’이다. 의원 유의태는 아들 도지와 제자 허준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한다. 자신의 뒤를 누구로 정할 것인가? 소신과 정리, 어느 측면에서 낙점할 것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의술인 이상 재능이 판단기준으로 서겠지만, 의술을 운용하는 자가 사람이고 보니 혈육의 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둘은 의술에 있어 누구랄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그렇다면, 당연 혈연이다. 더군다나 유교적 전통이 충일한 당시의 사회상에서 혈육의 연은 강력한 선택압으로 작용됐음이 분명하니 유의태의 선택은 아들이어야 한다. 사리가 그러함에도 유의태는 갈등한다. 의술을 펼침에 있어서 밑바탕이 되는 요소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환자는 경제적 수단이기에 앞서 인간적 애틋함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직업적 사명감이 더해져야 한다는 지론이 그를 흔든다.

환자를 대함에 있어 긍휼의 진정성이 없다면,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피고름을 빨아낼 수 있겠는가? 그런 근본적 사고와 의지는 학습 이전에 타고난 심성에서 기인하기에, 재능으로서 의술이 비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재능이 살집을 헤집는 칼이라면 심성은 환부를 보듬는 손길이다. 허준이 의술의 재목으로서 적합성을 보인 예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허준은 과거시험 상경 길에 역병이 휩쓴 마을에 지나게 된다. 이들을 구호하자면 자신의 목적을 접어야함은 물론 여차지 하면 자신도 그들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허준은 참혹한 광경을 간과하지 못하고 환자구제에 매달린다.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의자(醫者)로서 본분에 충실했던 것이다. 유의태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된다. 혈육인 아들을 택함으로써 시세(時世)에 따를 것인지, 의술의 재목으로서 허준을 택할 것인지 인간적인 고뇌에 빠진다. 유의태는 끝내 자신의 소신에 따르게 된다. 예의 ‘비인부전’을 들어 세속의 정리를 떨쳐내고 허준을 거둔다.


두 사례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전하고자 하는 도는 어떠하며 그 의도하는 바는 또한 무엇을 뜻하는가? 이제 그 의미가 발원하는 원시사회의 풍습과, 근대 불가 및 유가의 사회상에서 드러나는 ‘비인부전’의 용례를 살펴보자. 우선, 도를 사회공동이 존재하기에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 정의한다.


크지 않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원시사회, 인간의 의식은 자연을 대상자로서 자신과 분리한다. 자연을 인식하면서 자연현상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눈뜨면서 자연경외 사상이 싹튼다. 인간의식은 점차 자연을 자신의 생존을 좌우하는 의지체로 인식하게 되고, 그 의지에 순응함으로써 생존적 확률을 높여가고자 하는 욕구가 생성된다. 그러한 자연의지에 따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방편으로서 주술사를 세우고, 그로 인하여 자연의 의지를 지득한다. 자연의지로 나아가는 길은 삶의 지향점이 되며 생존의 안내서로서 지칭 도가 된다. 자연을 떠나지만(분리)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인간의식이, 불안함을 보완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인부전’이라는 의미의 가치체계가 모색된 것이다. 그렇다면, 원시사회에서 사람은 누구이며 전하고자 하는 것과 그 목적적 의미를 가려낼 수 있는가? 그 태생적 상황을 유추해보면 이렇다. 자연의 의지를 전하는 능력자로서 주술사는 사람이 되며,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의지에 따르는 방법이고, 그 목적적 가치는 생존확률의 높임이다.


사회발전에 따라 비인부전의 개념은 일보 확장된다. 혜능은 능력자로서 사람인 것은 같으나, 원시의 도는 인간의지가 가미되어 세상이치로 세련된다. 혜능은 홍인의 도를 담기에 넉넉한 그릇으로서 사람이어야 하며, 전할 것은 불가의 가치로서 세상이치이고, 그 목적 또한 같은 범주에서 인간구제다. 드라마 허준은 유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불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허준은 의술을 담는 능력자로서 그릇이다. 전하고자 하는 도는 유교의 가치체계이며 목적은 이상세계의 구현이다. 그 가치체계의 정점(頂點)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물론 인(仁)이다. 유의태가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린 데에는 유가사회의 가치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른다고 ‘비인부전’의 의미가 퇴색하진 않는다. 오히려 다각화된 현대사회의 역할구도에서 선명하게 제 빛을 드러낸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오늘날의 보편적 사회에서도 ‘비인부전’은 활발한 적응성을 보인다. 그러면, 우리사회에서 사람인 사람은 누구이며 사람 아닌 사람은 또 누구이어야 하는가? 민주사회에서 예의 사람은 국민을 대의하는 국가적 수장이나 고급 관료가 된다. 국민의 공복으로서 국민의 의중을 헤아리고 국민을 위해서 양심껏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자로서 사람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도는 주어진 역할을 실행하기에 필요한 시스템으로서 정치력이 되며 목적은 국리민복이다.

비인부전은 거대한 사회범주에서만 논의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사람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라면, 가정이건 직장이건 모두가 적용되는 공식이다. 가장으로서 또는 직장의 리더로서 사람인 사람이 되어야 함은 이 때문이다. 주어진 도의 진정한 용도를 알아야 하며, 그 목적적 의미를 잘 살펴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2010.11.02 허권립)


옮긴이의 말

이 글은 원글 작성자이신 허권립 님(http://blog.daum.net/lip570/17188027)의 허가를 얻어 본인의 블로그에 가져왔음을 밝혀둡니다.

세종대왕 폐하께서는 매년 시월에만 잠깐 얼굴을 내미셨다가 곧 천덕꾸러기 수모를 겪으신다. 그래서 몇 년전 연말은 참으로 우울했다. 유행가 가수 태진아씨가 문화훈장을
받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깔 다른 대선에서는 3 차례 TV토론이 있었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었던 그 토론 동안 문화가 말해진 것은 딱 한 차례 뿐이었다. 그것도 고작 영화 쿼터제에 
따른 돈벌이 얘기 뿐이었다니... 문화가 영화 뿐이고, 더 심하게는 요즘 영화도 문화 축에 드는건지... 어지럽다. 더구나 고작 그쯤이 시대문화를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한심한수준들이 나라의 대통령감들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차라리 몇십년 애지음을 모두 땅에 묻고 좌절하고 싶었다. 


유행가 가수의 공도 폄하할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지만 똑같은 그 순간에 살아서 겨우 쉰 남짓이 됐을 고 김진평 교수가 생각났다. 잘 아는 척 하다시피 인간이 인간다워진 이후의 생활을 문명이라 하고 문명의 시작은 글자의 탄생으로부터 가름되며 글자는 문명과 민족문화 계승 발전의 가장 근본이 되는 요체이다.


경제가 2 류, 정치가 3 류라면 지금의 국민은 4 류도 아닌 5 류다


문화조차 돈벌이 자로 재는가? 문화에 관한 한 3류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미국을 애써 선진미국문화라는 아부로 추켜 문화의 본질을 모욕하는 내로라는 우리 교수님들, 요즘의 미국을 ‘미국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의 문명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점잖게 평한 이라크 후세인 대통령의 말도 새겨둠직 하지 않은가? 문화란 몸이 느끼는 배고픔으로 재는 것이 아니라 생각와 마음의 배고픔으로 재는 그런 것이다. 

지음에 비해 돈벌이 안되는 글자 연구와 글자 디자인, 그래서 한줌도 안되는 연구가 겨우 몇몇 중에서 김진평 그는 그래도 학술로 헤아리려는 노력에서 발군이었다. 



서지학(書誌學)의 중요성을 문화의 본질인 글자로부터 살피려는 학자들은 잘 안다. ‘직지’... 본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찍은 우리 책... 이 얼마나 가슴을 펴고 뻐기게 해주는 이름인가. 그런데 왜? 이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데 구텐베르크보다 몇십년 앞선이라는 따위의 구차스런 말이 덧붙어야 하는가? 그 깊은 속내에 스스로의 문화를 의심하며 그에 대한 자존 없이 그저 이룸만을 즐기려는 야비한 기회주의가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 아닌가? 그리고 그 야비한 기회주의가 세태를 농단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무튼 1968년 ‘문화의 장물창고’  루브르박물관에서 직지를 발굴해 1972년 5월 이것이 세계최고의 금속활자인본임을 밝힌 박병선씨, 그가 바로 서지학자이다. 가슴 뻐근하게 해준 그 박병선씨에 이 나라와 백성들이 무엇으로 감사를 표했는지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나마 서지학자 거의는 한문 서지학자이고 한글 서지학자는 몇이나 되는지 조차 모르는 지경이다. 그 중 김진평은 한글 서지학을 글자디자인으로 헤아리려 애쓴 오직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93년 당시 문화부 임원선 사무관의 애씀 덕에 마련된 한글날 기념 ‘한글500년전’의 세종문화회관 전시에 불초도 부름을 받아 초대작가 다섯 중 하나라는 분에 넘치는 영예를 누린 바 있다.



전시 며칠전 임 사무관이 전시할 한글고서의 고증과 분류를 내게 청했으나 그만한 주제가 못되어 김 교수를 거명했다. 김 교수가 교환교수로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니... 그이 한 사람이 없어 이 나라, 이 백성들이 그토록 떠벌여 자랑하는 한글의 날 나랏일마저 어려웠다니... 이 따위가 무슨 세계 최초 금속활자의 나라이고 백성들이며, 이따위가 무슨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자 한글의 나라이고 백성들인가...


김진평, 그가 젊은 목숨을 바쳐 애써 헤아려 밝히려 했던 한글글자의 구조와 원리로 동료와 후학들 몇몇이 지금의 디지털 폰트시대를 근근이 이으며 1600여가지 (상업적 날림폰트를 빼면 가치를 부여할만한 건 몇 뿐이지만) 한글글자가 지어졌다고 한다. 그가 목숨을 다해 이 알량한 핏줄들을 위해 기울인 노고의 가치가 고작(?) 유행가 가수의 그것이나 어린 여가수와 골프선수 따위의 돈벌이 소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글쟁이들 좁은 소견에는 벼락맞을 소리지만 다룸의 길이 조금 다를 뿐 글자살이를 민족문화의 생존과 같은 반열에서 다룬 주시경 선생, 최현배 선생, 이희승 선생들에 견주어 모자랄 건 또 무언가. 문화에는 생존이 있고 생활이 있다. 운동, 유행가 따위가 없다면 생활이 불편할 뿐이지만 글자가 퇴락하면 문화는 생존을 잃고 문화를 잃으면 민족은 소멸한다. 글자는 몸짓, 입말, 그림처럼 서로의 뜻을 통하고자 생겨난 언어이다. 그 중 글자만이 거리를 격한 이웃과도 시대를 격한 조상과 자손도 생각과 뜻을 온전히 통하게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판단은 거의 8 할을 보는 것에 따른다.


뜻이 서로 통하매 같은 모여 살았고 한무리로 살매 생각이 같아져 무엇이 더 귀하고 천하고 중하고 경하고 선이고 후이고 따위가 같아졌다. 이것이 핏줄이 얽어 놓은 가족에서 민족까지이다. 그 이룸의 거의 8 할이 글자의 역할이라는 뜻과 같다. 


'세계의 가치관을 하나로'라는 넋나간 ‘세계화’에 너나없이 한동안 휘둘린 때가 있었다. 이는 19세기까지 아니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제국주의, 좀 더 솔직히는 침략주의나 약탈주의의 존 웨인 서부영화식 엉터리 역사왜곡일 뿐이다. 


문화는 돈거래 따위와 달리 달라야만이 존재의 까닭이 있고 긍정적 발전의 요소로 기능한다. 불초도 한글 글자살이를 위해 가산과 몸과 마음의 태반을 기울인지 그 새 이십여년, 이제 반생을 넘었다. 내친 걸음이라 가슴 뿌듯한 나만의 족함으로 견딜 뿐 더는 기울일 가산조차 없는 빈손이 되었다. 곰곰 생각하면 이건 나랏일이지 개인 몇몇이 감내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해는 저물고 갈길은 멀고... 다른 일에서지만 비슷한 고집으로 일생을 일관했던 가친의 소리를 나도 절로 되뇐다. 


헛바람에 콧대가 이마 위에 붙은 글쟁이들의 ‘문교부가 국보처럼 모시며 한글활자를 지은 박경서는 금호동 판자촌에서 죽고 지금 쓰는 한글글자의 태반을 만든 최정호는 16평짜리 연립주택에서 죽었는데 그림쟁이들 주제에...’라는 비아냥이 금방이라도 살이되어 쏟아질 것 같은 역겨운 세태에 온몸이 가렵다. 그들은 자화자찬의 입이 있고 우리는 그 입이 없음이 가슴 저리고 시리다. 글자의 본질은 뜻전달이며 입말처럼 비시각적 형태를 논리적 계약에 의해 전달하는 기능과 그림처럼 시각적 형태를 감상적 느낌으로 전달하는 두 가지가 있다. 




나는 전자를 글, 후자를 글자라 하고 글자는 글자꼴과 글자맵시로 기능한다. 따라서 생각을 시나 소설 따위로 표현하는 건 ‘글짓기’, 생각을 글자의 형태로 표현하는 건 '글자짓기’, 집을 짓는 건 집짓기이다. 그 글자짓기의 덕을 누리지 않는게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마는 그 덕을 한껏 누리는 건 신문, 방송, 인쇄, 출판 따위이고 겨우 한글날 즈음에만 활자문화 운운하며 나홀로 민족언어를 지켜 민족을 지킨 양 요란을 떨고, 가깝게는 나홀로 일제와 독재에 맞서 오늘을 이룬 양 촐싹대지만 스스로들을 거룩하신 오늘의 자리에 있게 한 글자연구에 최소한이나마 갚음을 했다는 건 과문 탓인지 아직껏 듣도 보도 못했다. 기껏 최초의 활자개발, 활자개량 따위를 떠벌여 돈벌이에 보탤 요량으로 들먹일 뿐 아직껏 쓸만한 연구에 터럭만큼이나마 애쓴 바 없다고 감히 단정한다.

또 글자문화에의 기여랍시고 제자랑이나 늘어 놓거나 돈될만한 걸 모아놓으려고 마련한 신문박물관 활자박물관을 들먹이거나 독자를 위한 가로짜기나 알량한 돈 몇푼 쥐어 주고 얻거나 울거낸 활자교체 따위를 들먹일지도 모른다. 재벌급 신문사, 방송국, 출판사, 인쇄소 ... 따위에 해당 부서가 있다면 살펴보라. 어느 기술부서 밑 외진 구석 한켠에서 겨우 겨우 연명하고 있기 십상일게다. 그게 여지껏 떼돈을 벌게 해준 숨은 공에 대한 갚음이라면 배은망덕이다. 광고판의 그림쟁이들의 괘씸은 부끄럽게도 더하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魏 문제文帝 조비(조조의 맏아들)의 살의를 피하게 한 아우 조식의 ‘칠보시’를 몰라도 제살깎기는 피하련만 나라도 기업도 은공 갚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싸구려 폰트로 팔아 연구비라도 충당할라치면 맨먼저 불법복제에 나서기 일쑤니 장사 젬병이는 열을 들여서 겨우 하나를 건지기가 어렵다. 그 심정이 하도 기막혀서 딱 떨어지는 그 ‘칠보시’를 적어둔다.


煮豆燃豆쉥(자두연두기)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하여 이리 급히 삶아대는가



지금부터 근1800 년 전 조비도 이 시를 깨닫고 아우 조식을 살려 주었다. 이제 제살깎기 도적질은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의 뒷 싯구처럼  ‘전승의 공(?)이 이미 높으니 바라건대 족함을 알거든 그만 함이 어떠하온지...’ 이 시를 받은 수隋 우중문 군은 달아나다 살수대첩에서 근 30만명 중 겨우 3천명 남짓이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가련한 한글을 차라리 없게 하여 주소서

세종대왕 폐하도 1990년대 앞무렵에는 일년에 딱 한 번 그나마 한글날 세종문화회관 전시로 체면치레 대접을 받더니, 요즘은 홍릉 세종대왕기념관 뒷마당의 동네잔치, 아니 서툰 아이들 운동회 수준 이하의 찬밥신세다.

명색이 문화관광부 장관 이름의 한글날 상장이 주어지는 마당이 어린이 미술대회 시상식장만도 못하고 마지못한 듯하던 한글날 즈음 기사조차 뜸해졌으니 만원짜리 돈의 세종임금 영정을 현실대로 처참한 몰골로 고치든지 차라리 지우고 세태가 종하하는 재벌이나 연예인 사진이나 담아야 하지 않겠는가? 화폐 손상이 심하다는데... 그렇게 미국식 싸구려 문화(?)에 넋나간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애지중지 아끼겠는가.

과거에는 성씨가 노인지 예스인지 대통령님 아니 나랏님, 이제는 이씨 성을 가진 나랏님, 한글이 한글날 노랫말처럼 민족의 자랑, 나라의 자랑이라면 집 팔고, 몸 버리고, 마음 상하고 끝내는 목숨마저 버리며 지어낸 한글글자들이 딴따라 손짓 발짓도 특허라는 세상에 왜 법이 보호할 수 없는지 살펴 밝혀주심이 어떠하신지...

글자디자인에 포함된 예술성을 감히 법원이 판단하겠다는 건방진 요지로 판결하신 그 판사님 만나 뵙고 얼치기지만 서예로 한글글자를 쓰면 저작권이 있고 세종임금의 마음처럼 모두가 쓰기 편하도록 몸과 마음을 바치고 돈들여 한점 한확을 위해 익힌 역사공부까지 곁들여 디지털 폰트로 지으면 저작권이 없다면 소도 웃을 까닭을 따져 묻고 싶은데 어떠하신지...


글자 아니 한글 아니 더 좁혀 한글활자 덕에 떼돈 버는 신문사, 방송국, 출판사, 인쇄소님들 내 나라 앞날에 아무 보탬 안될 외국 딴따라 따위를 불러들이는데는 협찬도 잘 하시고 생색나는 대학에는 돈도 건물도 기증 잘 하시더이다. 불쌍한 세종임금 잔칫날에 돈 몇푼씩 동냥(?)해서 잔칫상이나마 남 부끄럽지 않게 해주심이 어떠하신지... 그리고 ‘빨간바지’복부인 김여사, 이여사 마냥 골동품 사잴 박물관 지은 걸로 눈가리고 아웅하려 들지 말고 제대로 된 글자문화 또는 시각언어연구소 하나 쯤 만들 생각은 없으신지...

다른 말도 또 소리도 있겠지만 내 배불려 주고 등 따시게 해주느라 생을 기울인 고 이원모, 고 박경서, 고 조정수, 고 최정호, 장봉선옹, 최정순옹, 이남흥옹, 고 김진평 등등의 업적을 후학들도 살피게 할 기념관이나 글자짓기 박물관 하나 쯤 만들 생각은 없으신지... 설마 알량한 고료 몇푼이나 월급 몇푼으로 겨우 허기 메워준 걸로 갚음을 다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신지... 유행가 가수에도 앨범판매가 대박이 나면 계약 외 뭉칫돈 선심이 있답디다. 또 점심값 조금 줄이고 저녘 술값 조금 아낀 것만으로도 애비 잃고, 남편 잃고 그리 넉넉치 못하다는 고 김진평씨 유족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텐데 자녀들 장학비나 혼수 쯤 맡으실 생각은 없으신지... 그 공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자그마한 공모전이나 상을 하나쯤 제정할 생각은 없으신지...


이 얼마나 푼돈 몇푼으로 명분있고, 생색나고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잡고, 꿩 먹고 알 먹는 노릇이오이까.


세종임금이 임금노릇 19년 동안 어린백성들을 위해 책을 읽고 또 읽느라 당뇨병에 걸려 눈마저 희미해진 몸으로 중국에 다르고저 한글을 애지었다면 이는 우리는 ‘한울님 자손’이라는 뜻을 담고자 했음이 틀림없다.


한글날... 세종임금 그 뜻깊음에 감사하자는 날... 그 잔치마당의 어지러움은 장사치들의 난장을 간신히 면한 수준이었고 공모전 시상식장의 썰렁함은 난민촌 운동회 시상식장만도 못했다. 그 저편에 있는 세종임금상의 몰골이 통곡으로 간절히 애원하는 듯했다. ‘제발 한글과 한글날을 없애달라’고... 그리고 나도 뜬 눈으로 근 절반을 지샌 지난 이십여년과 어쩌면 이깟 한글 글자짓기 짓거리가 아니었다면 잃지 않았을 내 피붙이들의 주검을 생각하며 속깊이 통곡하며 간절히 애원했다. ‘차라리 한글날을 없게 하여 주십사’고...
 


[원문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47&aid=000002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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