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은 됐을 듯싶다. KBS-TV에서 문학작품을 극화 방영하는 ‘TV문학관’이란 프로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인가, 방영시간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심취하였다. 시청한 것 중에 아직껏 기억되는 것이 이문열의 금시조다. 글씨라는 하나의 길을 가면서 스승(석담)과 제자(고죽)간의 갈등을 소재로 하는데, 등장인물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글씨란 도인가? 예인가? 글의 궁극은 도에 이르러야 한다는 스승과 실용적 예술을 주장하는 제자가 필연적으로 부딪히는 애증의 세월을 그리고 있다. 제목도 생소하려니와 극 중의 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스승인 석담과 친구와의 대화 장면이다. ‘어찌하여 고죽을 제자로 거두려 않느냐?’는 물음에 석담은 왕희지의 말을 빌려 ‘비인부전’이라고 짤막하게 심중을 토로한다. ‘비인부전’이라? 사람이 아닌 사람에겐 전할 수 없다? 그 한마디가 비수와도 같이 뇌리를 깊숙이 파고든다. 석담이 말하는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전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목적적 의미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세월이 한참이나 격한 지금, 간간이 세간에 떠도는 ‘비인부전’이 옛일을 상기케 한다. 이제 심중에만 담아두었던 그 비수를 끄집어내어 의미를 밝혀보려 한다. 발생적 상황과 시대에 따른 활용사례, 그리고 오늘의 관점에서 교훈적 의미를 도출해보고자 한다.


‘비인부전’의 근원은 중국 고전 “황제내경의 기교변대론”에서 찾는다. 소문 제69편에 “其人不教 是謂失道 傳非其人 慢泄天寳”란 문장이다. ‘사람은 가르치지 않으면 도를 잃고, 사람이 아닌 사람을 가르치면 오만하여 도를 누설한다.’로 풀어볼 수 있고, 의역하여 이해를 돕자면 ‘사람이 배우지 아니하면 도를 알지 못하고, 모자란 사람에게 도를 가르치면 오히려 도를 그르친다.’로 해석할 수 있다. 후세의 사람들은 위 문장에서 ‘사람이 덜된 사람을 가르쳐선 안 된다.’는 교훈을 도출하였고 ‘비인부전’으로 의미를 축약한다.


‘비인부전’의 활용사례로는, 몇 해 전 방영된 최완규 극본의 드라마 ‘허준’과, 멀리 중국의 선불교 6대 조사 혜능이 법맥을 전수 받는 과정을 들 수 있다. 먼저 시대 순으로 앞선 혜능의 예를 보자. 중국 선불교는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선사를 시조로 한다. 달마선사의 대를 이어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이 법맥을 잇는다. 5조 홍인이 제자를 구하는 과정에서 ‘비인부전’의 용례를 찾을 수 있다. 그의 문하에는 오랫동안 학업을 닦은 뛰어난 제자 신수가 있어 의당 그가 법맥을 이을 것으로 보았는데, 홍인은 뜻밖에도 경력도 일천한 혜능이라는 신참내기에게 법을 전수하게 된다. 혜능이란 자는 누구이기에 홍인의 마음을 잡았는가? 그의 근기(根器)가 신수를 능가하는가? 혜능은 가난하고 무식했던 젊은 시절 한 객승의 금강경을 듣고 불교에 귀의할 뜻을 굳혔고, 홍인의 문하에 들어간다. 홍인은 혜능의 그릇을 알고 법맥을 전수할 것을 작심한다.

문제는 문하식구들이다. 아무리 법맥전수가 홍인의 전권이라도 해도 문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법력 일천한 혜능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홍인은 자신의 선택에 합당성을 부여하고자 방법을 모색한다. 신수와 혜능에게 시를 짓도록 하여 대중 스스로가 감득하도록 한다. 먼저 신수의 시다. “몸은 보리수이고, 마음은 명경대와 같다.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로 짓고, 뒤이어 혜능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또한 거울이 아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끼겠는가?”라고 대응한다. 사물을 꿰는 두 사람의 심안이 그러하였다. 홍인은 두 제자의 시를 들어 보이며 혜능에게 법을 전한다.


다음은 드라마 ‘허준’이다. 의원 유의태는 아들 도지와 제자 허준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한다. 자신의 뒤를 누구로 정할 것인가? 소신과 정리, 어느 측면에서 낙점할 것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이 의술인 이상 재능이 판단기준으로 서겠지만, 의술을 운용하는 자가 사람이고 보니 혈육의 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둘은 의술에 있어 누구랄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그렇다면, 당연 혈연이다. 더군다나 유교적 전통이 충일한 당시의 사회상에서 혈육의 연은 강력한 선택압으로 작용됐음이 분명하니 유의태의 선택은 아들이어야 한다. 사리가 그러함에도 유의태는 갈등한다. 의술을 펼침에 있어서 밑바탕이 되는 요소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환자는 경제적 수단이기에 앞서 인간적 애틋함을 바탕으로 깔고 그 위에 직업적 사명감이 더해져야 한다는 지론이 그를 흔든다.

환자를 대함에 있어 긍휼의 진정성이 없다면,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피고름을 빨아낼 수 있겠는가? 그런 근본적 사고와 의지는 학습 이전에 타고난 심성에서 기인하기에, 재능으로서 의술이 비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재능이 살집을 헤집는 칼이라면 심성은 환부를 보듬는 손길이다. 허준이 의술의 재목으로서 적합성을 보인 예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허준은 과거시험 상경 길에 역병이 휩쓴 마을에 지나게 된다. 이들을 구호하자면 자신의 목적을 접어야함은 물론 여차지 하면 자신도 그들과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허준은 참혹한 광경을 간과하지 못하고 환자구제에 매달린다.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의자(醫者)로서 본분에 충실했던 것이다. 유의태의 고민은 여기서 비롯된다. 혈육인 아들을 택함으로써 시세(時世)에 따를 것인지, 의술의 재목으로서 허준을 택할 것인지 인간적인 고뇌에 빠진다. 유의태는 끝내 자신의 소신에 따르게 된다. 예의 ‘비인부전’을 들어 세속의 정리를 떨쳐내고 허준을 거둔다.


두 사례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람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며, 전하고자 하는 도는 어떠하며 그 의도하는 바는 또한 무엇을 뜻하는가? 이제 그 의미가 발원하는 원시사회의 풍습과, 근대 불가 및 유가의 사회상에서 드러나는 ‘비인부전’의 용례를 살펴보자. 우선, 도를 사회공동이 존재하기에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 정의한다.


크지 않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원시사회, 인간의 의식은 자연을 대상자로서 자신과 분리한다. 자연을 인식하면서 자연현상에 의존해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눈뜨면서 자연경외 사상이 싹튼다. 인간의식은 점차 자연을 자신의 생존을 좌우하는 의지체로 인식하게 되고, 그 의지에 순응함으로써 생존적 확률을 높여가고자 하는 욕구가 생성된다. 그러한 자연의지에 따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는 방편으로서 주술사를 세우고, 그로 인하여 자연의 의지를 지득한다. 자연의지로 나아가는 길은 삶의 지향점이 되며 생존의 안내서로서 지칭 도가 된다. 자연을 떠나지만(분리)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인간의식이, 불안함을 보완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인부전’이라는 의미의 가치체계가 모색된 것이다. 그렇다면, 원시사회에서 사람은 누구이며 전하고자 하는 것과 그 목적적 의미를 가려낼 수 있는가? 그 태생적 상황을 유추해보면 이렇다. 자연의 의지를 전하는 능력자로서 주술사는 사람이 되며, 전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의지에 따르는 방법이고, 그 목적적 가치는 생존확률의 높임이다.


사회발전에 따라 비인부전의 개념은 일보 확장된다. 혜능은 능력자로서 사람인 것은 같으나, 원시의 도는 인간의지가 가미되어 세상이치로 세련된다. 혜능은 홍인의 도를 담기에 넉넉한 그릇으로서 사람이어야 하며, 전할 것은 불가의 가치로서 세상이치이고, 그 목적 또한 같은 범주에서 인간구제다. 드라마 허준은 유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불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허준은 의술을 담는 능력자로서 그릇이다. 전하고자 하는 도는 유교의 가치체계이며 목적은 이상세계의 구현이다. 그 가치체계의 정점(頂點)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물론 인(仁)이다. 유의태가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린 데에는 유가사회의 가치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른다고 ‘비인부전’의 의미가 퇴색하진 않는다. 오히려 다각화된 현대사회의 역할구도에서 선명하게 제 빛을 드러낸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오늘날의 보편적 사회에서도 ‘비인부전’은 활발한 적응성을 보인다. 그러면, 우리사회에서 사람인 사람은 누구이며 사람 아닌 사람은 또 누구이어야 하는가? 민주사회에서 예의 사람은 국민을 대의하는 국가적 수장이나 고급 관료가 된다. 국민의 공복으로서 국민의 의중을 헤아리고 국민을 위해서 양심껏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자로서 사람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도는 주어진 역할을 실행하기에 필요한 시스템으로서 정치력이 되며 목적은 국리민복이다.

비인부전은 거대한 사회범주에서만 논의되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사람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라면, 가정이건 직장이건 모두가 적용되는 공식이다. 가장으로서 또는 직장의 리더로서 사람인 사람이 되어야 함은 이 때문이다. 주어진 도의 진정한 용도를 알아야 하며, 그 목적적 의미를 잘 살펴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한다.


(2010.11.02 허권립)


옮긴이의 말

이 글은 원글 작성자이신 허권립 님(http://blog.daum.net/lip570/17188027)의 허가를 얻어 본인의 블로그에 가져왔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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